수안보 온천에서
수안보 온천의 야간 루미나리에
중원미륵사지(사적 제 317호)
월악산국립공원 내 하늘재 아래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사찰지로 현재
파손된 사원 안에 석불입상이 서 있고,그 앞으로 역시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 지는 8각 석등이 있고
석등의 전면에는 미륵리 5층석탑으로 알려진 석탑이 1기가 존재하는 단탑가람(사원)배치의 형식을 갖춘 사지이다.
일찍부터 석굴사원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발굴과정을 통해 많은 유구와 유적이 발견되어 이 미륵당이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과 같이 더운 기온을 피하기 위하여 석굴에 사원을 만들지만
우리나라에는 석굴사원과 같은 양식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한다.
다만 경주의 토함산 석굴암만이 유일무이
하다고 했는데 미륵당 역시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경주 석굴암 복원 과정에서 참고로 이 미륵리 주실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석굴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서는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지의 이름은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고증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왕권회복을 도모코자 강원도 한계산성으로 가는 도중 미륵사와 더불어 세웠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충주여행정보에서 발췌)
미륵리 석불입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는 높이 9.8m의 거대한 미륵입상이 있는데
건립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에 미륵대원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저자인 일연 스님이 살았던 시대 이전에 만든 것은 확실하니,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제95호 미륵리 5층석탑
미륵리 5층석탑은 높이 6m의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했으며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지대석으로 사용하였고 지대석과 기단부가 커다란 자연석1매로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일부러 파 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로 되어 있다.
탑신부는 높지 않고 옆으로 넓어진 방형중층의 양식을 갖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볼 수 있으나,
흔히 석탑에 표현되는 우주와 탱주가 나타나 있지 않고 상층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덮여 있고
탑신부에는 초층 옥개석이 2매이고 탑신이나 옥개석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고
옥개 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세련미가 부족한 듯 보여지고 있으나
상륜부에는 큼직한 노반이 있고 정상에는 철제로 만든 철주가 남아 있어
또 다른 계의 신라말 고려 초의 석탑 구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공기돌 바위( 온달 장군)
월악산 국립공원 미륵리 미륵사지 내에 있으나 미륵사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이 가미된 바위로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다하여
거북바위라 불리우는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기돌) 바위로
온달장군의 전설로 인해 공기돌 바위로 알려진 바위이다.
동쪽의 하늘재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으며
고구려 평원왕 때온달장군은 스스로 군사를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상류 지역인 이곳과 죽령부근의 단양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 지역에 주둔하며 성을 쌓을 때 휴식시간에 이 바위를 공기돌로 사용하여 놀았다 하여 온달장군의 공기돌 바위라 한다.
온달장군은 단양 영춘면 아단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려고 해도 도무지 관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 났으니 마음 놓고 떠나가시오" 라고 하자
관이 떨어져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미륵사지 입구에 있는 밭 가운데에 삼한시대 토축한 길이 6.2m 폭5.4m의 무덤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를 온달장군의 묘로 부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미륵리 귀부(龜趺)
우리나라 최대의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로 원위치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위치로 보아 사적비를 세웠던 받침으로 추정되는데 비신은 없어 지고
등에는 비좌의 조출이 없이 비신을 꽂았던 구멍만 뚫어져 있다.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음각하였고
앞쪽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 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거북의 머리는 힘없이 앞으로 내밀어져 있고
등의 구갑문도 생략되는 등 규모만 크고 조각이 약소한 귀부이다.
없어진 비신에는 분명히 절의 창건 내력이나 연혁 또는 중수사실등이 기록되어
이 사찰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몇 차례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찾지를 못하였다. 미륵리 미륵사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리 팔각석등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는 오래된 고찰지인 미륵사지가 있으며
사지내의 미륵석불과 오층석탑 사이에 높이 2.5m의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 있다.
팔각의 기본형태에 방형인 복련 하대석과 그위에 8각 간석을 세우고
양련의 상대석을 얹었으며 8각의 화사석에 옥개석을 놓았고 상륜부에는 보주가 있다.
미륵리 사각석등
미륵사지 내에 있는 또 다른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77년도 미륵리 사지 발굴 작업 때 찾아내어
5층석탑 북쪽에 다시 세운 것인데 원위치는 아니다.
방형의 지대석에 복련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안상이 새겨진 4각의 간석을 세우고
간석위에 4각의 상대석,화사석에 해당하는 4우주를 얹었다.
이 석등은 8각의 기본형을 벗어나 4각으로 약식화 되어있다
송계계곡의 겨울로 가는길.
덕주산성
돌아오는길에 임시개통이 된 청풍대교를 시원스레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