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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딸/오탁번

ds3ckb 2008. 6. 18. 20:59

숨은 딸

        - 詩 오탁번 -

 

나도 숨겨놓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아빠'부르면서 카네이션 꽂아주며

내 볼에 뽀뽀해줄 보조개도 예쁜 내 딸!

'어험, 어험' 하며 처음에는 멋쩍겠지만

내심으로는 뛸 듯이 좋을꺼야

아내는 뾰로통해서 눈 흘기겠지만

덤으로 생긴 딸 설마 구박은 안 하겠지

보름달 따올 만큼 힘세던 내 젊은 날

숨겨논 딸 하나 못 만들고 무얼 했을까

숨겨 논 딸이 없어 민망하긴 하지만

제 발로 숨어버린 딸은 많을지도 몰라

아득한 젊음의 새벽길에서

눈물훔치며 떠났던 여자들이

나한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딸 하나 몰래 낳아 키웠을지도 몰라

 

숨어버린 딸이 운명의 해후를 위해

광속으로 달려와 내 앞에 선다면

DNA검사 없이 바로 내 딸을 삼을 거야

호적에도 바로 올려 올리고 재산도 나눠주고

큰 눈동자 빛나던

내 젊은날의 흑백사진 보여줄 거야

아아,우주의 어느 행성 바닷가에서

사랑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어여쁜 내 딸아

지구가 혜성에 부딪혀 파멸하는 날이 오면

나는 숨어있던 내 딸을 데리고

빙하기를 견디며 살아남아 있을 거야

몇 천 년 몇 만 년이 흐르고

빙하에 짓눌렸던 한반도가 다시 떠오르면

나는 내 딸을 데리고 화석에서 뛰어나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 한 채 지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