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시인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중등교육을 원주에서 받은 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한국 현대시를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하여 그 동안
시집 「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을 출간하고,
소설집으로 「처형의 땅」「저녁연기」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순은의 아침」 등 출간하였다.
소설 「우화의 땅」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시집 「겨울강」
동서문학상, 시 「백두산 천지」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