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背佛)의 조선시대가 주는 교훈(2학기 리포트)
배불(背佛)의 조선시대가 주는 교훈
1. 조선건국 초기의 불교
고려일대를 통해 왕실의 보호에 힘입어 극성(極盛)하던 불교는
등이 불교를 배척케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왕조의 출현과 함께 불교는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건국 초부터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2. 억불정책 -태종과 세종
태종의 즉위와 함께 12종파를 7종(조계(曹溪)·천태(天台)·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총남(摠南)·시흥(始興) 7개종파로 통폐합하고
각 종파의 소속사찰을 극히 제한했다.
또 사찰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사원경제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태종은 이밖에도 도첩제도(도첩은 국가가 승려에게 그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시에
군역의 면제증이기도 했다.)를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게 시행하여
일반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봉쇄했다.
또 고려 이래의 제도이던 왕사·국사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되어 선. 교 양종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들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3.억불정책 -성종과 연산군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 하였다.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하는 것은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국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기야 성종은도첩제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되어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승과(僧科)도 폐지하였고, 선. 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시켰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의식적인 조치보다는
단순히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계승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선교양종의 대표사찰인 흥천사와 흥덕사도 폐사하였고
승과제도도 폐지하였으며
중종때는 양종의 구별까지 없애는 극도의 불교탄압정책을 시행하였다.
4.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불교부흥
인종의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이 감돌았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문종대비가 섭정하는 이때가 그나마 조선불교의 미약한 황금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종대비가 승하한후 대비의 측근이던 승려 보우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장살되면서
승과는 다시 폐지되고 불교는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승려들은 선조25년 임진왜란에 왜군의 침입에 항전하는 군인으로 동원되면서
서산대사(휴정)는 8도도총섭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전란이 끝나자 다시 소외되기 시작하였으니
현종이후에는 더욱 탄압이 심하였다하니 저간의 승려들의 비감했던 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의 불교는 철저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불교 역사의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崇儒政策)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 않았다.
태조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때 부터 도첩제를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그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것도 그런 것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히 대중에 대한 교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기때문이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리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5. 세조의 불교 장려정책
급속히 몰락하던 조선불교는 세조대(世祖代)에 이르러 반짝 소생의 기운을 찾았다.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불교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첫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고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야당격이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세종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허용하는 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6. 조선 말기의 불교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있는 한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과 염불을 구
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사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억불 정책은 국가적 귀족적 불교를 소멸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末法 시대의 고통을 구제할
당대 불교로서의 미륵 하생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히 침투하였다.
7.결론 : 숭유억불정책의 심각한 부작용 및 이에 바탕을 둔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