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진

철암...내 유년의 기억

ds3ckb 2013. 1. 21. 05:11

유년으로 향하는 아날로그 여행이야기.

철암(鐵巖)’은 이웃한 백산동과 경계를 이루는 철도변에 거대한 쇠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옛날에는 이 바위를 쪼개 녹여서 쇠를 얻었다고 한다.

내가 아주 어릴적 서너살때쯤 ..

부모님의 보따리 이삿짐과 함께   철암으로 갔다.

뚜렷한 직업이 없으신 아버지께서 철암 장성광업소에 광부로 취직하기 위해서 

어린 자매를 데리고 탄광촌을 찾아들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광부 신체검사에서 낙방하시고

그길로 우리가족은 아버지의 막노동에 의지하여 

궁핍한 60년대의 최저생활을 근근히 이어가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동생이 둘이나 태어나서 여섯명의 가족으로 늘어난 대가족의 

무능한 가장이셨던 아버지는

내가 철암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의 반학기 정도 다녔을무렵

어린아이의 입이라도 하나 덜 요량으로 나는 경북 영천의 외가댁으로 보내졌다.

그 후론 50년 세월이 흐르는동안 철암에 가본일이 없으니

이번 철암여행은 실로 50여년만에 내 유년의 저편에 있던

기억의 편린들을 이어맞추는 퍼즐여행인 셈이다.

철암에 첫발을 딛는순간

입구에서부터 펼쳐진 무채색의 낡고 허름한 건물과 마치 60년대의 영화세트장같은

시간이 정지해버린듯한 풍경이 충격이었다.

한때 이곳 선탄장에서 실어 간 석탄이 전국 각지에서 불을 밝혔고,

돈을 쫓아 전국에서 광부들이 부나비처럼 몰려들었다.

 “지나가는 개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만복이 얘기가 회자될정도로

흥청거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장성광업소만이 명맥을 이을 뿐 

대부분의 탄광촌이 폐광이 되면서  흥청대던 유흥가와 식당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떠날곳이 없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3,000여명의 주민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60년대 시간에서 정지한듯 과거의 흔적이 아련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철암

시간이 정지된듯 한 철암으로 향하는 아날로그 여행의 이모저모를 실어본다.

 

 


철암의 초입 벽에 쓰여진 낙서들은 그 시절 광부들의 애환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광부들의 고된 삶이 녹아있는 역사의 기록이다.

 

 

 

 

 

 

 

 

철암역을 지나서 삼방교를 건너자 산비탈에 터를 잡은 판잣집들이 위태롭다.

삼방동은 과거 광부들의 사택이 몰려 있던 곳이라고 한다 

닭장처럼 붙은 판잣집은 비좁고 낮고 춥고 습하다.

이 마을에는 벽화가 여러군데 그려져 있다.

아마도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는 무명화가들의 모임에서

그곳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담벼락에 표현해주는것인성싶다.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면서 아날로그적  추억에 잠겨본다

 

광부들과 가족의 생활상이 묘사된 그림이다.

그중 가운데 그림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고된 노동과 막장에서 살아왔다는 기쁨도 잠시...무거운 삶의 무게에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듯...

 

 

 

산업주의화된 사회구조에 인간이 오로지 생산도구로 변천하는 과정을 그린듯한 ..

결국엔 바코드로 형상화하여 인간의 생산가치가 평가되고마는...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진 그림인것 같다.

 

 

과거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한듯한 마을.

한적한 분위기는 시간이 지워진 듯했고

삼방동마을은 60~70년대 영화세트장에 온 느낌이다.

이곳 삼방동마을에서 안성기 박중훈주연의 영화 "인정사정 볼것 없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기에도 웬지 미안한 마음이 앞서 망설여지는곳.

오랫만에 한낮 영상의 포근한 날씨임에도 마음은 정말 차갑고 시렸다.

 

삼방동 언덕에서 바라본 장성광업소 전경.

온통 무채색의 검은가루 천지인 광업소풍경은 차라리 흑백사진으로 표현하는것이 더 정확할것같다.

 

 

 

 

도로명 주소가 붙어있는것을 보면 현재 주민이 살고있는것이 확실하다.

언덕아래 철암천이 흐른다.

예전에 이곳 초등학교 아이들이 개천을 그릴때는 까만색을 칠했다고한다.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먼지가 개천물을 까맣게 물들였으니...

아이들의 눈에는 강물도 까맣게 상상했음직하다.

지금은 갈수기여서 물이 흐르진 않는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제법 맑은 물이 흐르고 서울보다 공기가 깨끗하다고한다.

그러나  깨끗해진 만큼 주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다.

 

허름한 판자촌뒤로 저멀리 거대한 교회성전이 너무 대조적이다.

가난한 주민들의 삶 가운데에 저리도 큰 교회건물이 떠억 버티고 있는것이

어쩐지 생경스럽다.

과연 이 교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곳 주민들을 위하여 큰 복을 내려주신걸까?

 

 

 웬지 슬프게 보이는 벽화

그나마 이렇게 그림이라도 그려져있으니 사람이 살고있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골목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골목길을 휘감아도는 매캐한 연탄가스냄새.

석탄이 풍부한 철암마을의 주연료는 역시 연탄인듯..

경운기도 들어올 수 없는 이 좁은 골목길로 연탄을 나르는 손길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60년대보다 지금은 먹고살기는 조금 더 나아졌겠지만

사회는 격변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밑바닥 인생들이 딛고 서야할 자리는 점점 줄어만가고..

지금은 이곳 철암마을의 쇠락한 폐광촌모습을 보러 찾는이들이 많다고 한다.

 장성광업소 철암갱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놓아야할것 같은 나만의 생각일까?

 

 

 

 

 

삼방교의 교각에는 광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캐릭터가 있다

캐릭터의 모습은 무척 귀엽고 행복해보이건만

과연 광부들은 그렇게 행복했을까?

 

 

내가 어린시절 살던 후미끼리 동네에 갔다.

후미끼리는 일본말로 건널목이라는 뜻이란다.

마을앞에 철도건널목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것 같다.

거의 50여년만에 어릴적 향수가 서린 후미끼리에는

내가 놀던 놀이터도..

내가 살던 집도...

내 친구도...

어느것 하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있다.

단지 마을앞에 있는 건널목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개천이 내가 어릴적 멱 감던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려 줄뿐.

정부에서는 길가에 늘어선 미관을 해치는 폐가를 모두 정리하는 계획을 세워두었다고 전해진다.

추억이 깃든 이곳이 다 헐리기전에

꼭 다시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다.

다음번 철암여행에는 내가 다니던 철암초등학교도 방문하여

고전무용을 곧잘 추던 나를 이뻐라해주시던 담임선생님의 존함도 꼭 찾아봐야겠다.

선생님을 만나면 총각선생님이시면서도 왜 그리 무용을 좋아하셨는지

그 이유도 꼭 여쭙고 싶다.

이제는 남은 사람보다 떠난사람들이 더 많은곳.

떠나지못하고 이곳을 아직 부둥켜안고 삶을 살고 계시는 친절한 동네 아주머니도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