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주사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서기586)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신라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내준 뒤에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 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친 그 뒤로 산 이름을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소재지: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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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입구에 덕주사 산사음악회를 알리는 공지 현수막이 걸려있다.
간간히 비가 내리는 산중턱에는 운무가 걸려있다.
덕주사 오르는 계곡에 맑은 물소리가 청아하다.
덕주산성 북문
덕주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덕주산성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 예로부터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 곳 월악산 덕주사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 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가 쌓은 성이라 해서 덕주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주사 입구 주차장에서 본 덕주사 모습.
우측에 범종각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이 돌계단을 따라 올라야 대웅보전에 이른다.
대불정주비각.
이 비석은 1988년 2월에 월광사지 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문이 인도의 산스크리트(Sanskrit)를 표기한 옛 글자인 범자로
새겨졌으며 비문은 모두 11행으로 첫 줄에 '대불정주(大佛頂呪)'라 음각된 한자로 시작되고,
나머지 약 1050자는 모두 범자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오랜 세월 속의 풍화 작용에 의하여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하며
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비석의 능엄주는 제7권에 나오는 다라니로서 모든 마군(魔軍)과 외도(外道)를 항복 받고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남한지역에서는 이것이 유일하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161Cm, 너비 163Cm이다.
고려 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에 있는 능엄주를 새겨 넣은 것으로
불교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하며
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비석의 능엄주는 제7권에 나오는 다라니로서
모든 마군(魔軍)과 외도(外道)를 항복 받고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문헌: 덕주사 자료)
덕주사 산신각
돌 벽사이에 산신각이 조성되어 있다.
덕주사 산신각은 단기 4326년(서기 1893년 고종 30년)에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성일화상(性一和尙)께서 가로 180Cm, 세로 210Cm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해 봉안하니
월악산 영봉의 산신이
이곳에 외호신으로 안주해 참배자의 염원을 받아들이고 있다.
덕주사 대웅전 (6.25때 불에 타버린것을 1970년에 새로 지음)
관음전과 약사전으로 통하는 길목.
덕주사 약사여래입상(德周寺 藥師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장인의 것이 아닌 신심이 돈독한 불자가 원력으로 소박하게 만든 것으로 병들어 아픈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자기 아픈 부위와 같은 부처의 몸을 긁어다가 그 가루를 먹고 낳았다고 하는데 현재도 그 긁은 자국이 남아있으며
또는 코 없는 부처님이라 하는데 병자가 부처님의 코를 갉아먹고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다.
이 자리는 원래 정금사 절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있던 불상으로, 충주댐 건설로 1983년 4월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한다.
부분적으로 닳았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에 속한다.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몸통의 밑 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을 뿐 옷 주름 등은 상태가 양호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낮고 작은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지만 풍만하며 양쪽 눈은 가늘고 긴 듯 하나 닳아서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형식적으로 표시하고 가슴 부분이 널찍하게
드러났으며 왼쪽 편에 주름이 몰려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드러내어 엄지에 새끼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배아래
부분까지 들어 약그릇을 받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며 대좌(臺座)는 별도로 만들어 양발만을 윗면에 조각하고 위로 몸통을 얹고 있다.
(문헌: 문화재청 자료)
절마당에 산사나무에 알알이 달려있는 산사열매에 가을빛이 스며들었다.
탱글 익어가는 고운 빛깔이 탐스럽다.
절에서 기르고 있는듯 보이는 견공(犬公)
각각 보살과 처사님이다.
<참고> 덕주사에 대한 문헌.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덕주사는 월악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지었다.'는 기록에 따라 10세기 중엽을 절의 창건연대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어 잘 알 수 없다.
한편 덕주사의 역사를 살피는데 있어서 상덕주사와 하덕주사의 존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 '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는 창건 이래 꾸준히 법당 등을 이어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963년에 지암 권정철 스님이 지금의 덕주사를 중창했고, 이어서 1970년에는 박해찬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때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고려시대의 금고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5년 성주스님이 절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보인다.
1985년의 중창 당시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덕주사로 옮겨 봉안했다.
최근 1998년 청하 성일 스님이 주석하면서 건물 오른쪽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2007년 현 주지스님이신 원경스님이 부임하셔서 도량을 일신하고 계신다.
(문헌 출처: 덕주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