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

영주 봉황산부석사

ds3ckb 2010. 11. 1. 23:07

 

 

 

 

 

내가 20중반쯤 직장산우회에서 단체산행을 처음으로 가본 부석사를

이후로 대여섯차례 다녀온 기억이 있지만

지난 주말처럼 많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용한 산사에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부석사  은행길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나섰던 여행은

절에 들어서기전 4Km전부터 차가 지체,서행,정체를 반복.

처음엔 영문을 몰라 무슨 축제가 있는날인가 의아해하면서

걸음걸이의 속도로 진행되는 지루함을 견디며 겨우 도착한

 주차장은 그야말로 차파와 인파의 초만원사태였다.

최근 모방송국에서 1박2일 오락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로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조용하던 절간은 마치 유명관광지로 바뀌어버렸다.

전국채널의 오락프로그램이 주는 위력을 실감한 하루였다.

고요함과 명상의 순례지로 기억하고있던 부석사의 옛 정취는 간데없고

 시장통,북새통으로 바뀌어버린 지금의 모습에 가슴한켠이 씁쓸해짐을 감출길이 없다. 

 

부석사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 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제17호).석조여래좌상(보물제220호).

삼층석탑(보물제249호)당간지주(보물제255호)석조기단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제18호)조사당(국보제19호)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제46호)고려각관(보물제735호)원융국사비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最古목조건물중의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안에 보관되어있다.

 

 

 

부석사 주차장 옆에 인공폭포를 조성해 놓았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2시에도 부석사입구에 죽 늘어선 식당들마다

관광객들이 초만원사례여서 아예 들어오는 손님을 수용하지못할 정도이다.

이대로 점심을 굶는가 하다가 겨우 두부 한모와 동동주 두잔으로 허기를 면하는가  했는데

때마침 무늬만 산채비빔밥을 겨우 배식받아서 끼니를 때우는 잊지못할 해프닝을 겪기도...

이러기에 유명관광지는 피해서 다녔건만...

 

부석사 입구 양쪽으로는 탐스럽게 열린 사과밭이 줄지어 있다.

 

절 입구에는 길게 노점상 할머니들의 고단한 일상이 늘어서있다.

 

녹색과 빨간 단풍잎의 대비가 아름답다.

 

매표소에 길게 줄지어 늘어선 관광객들.

 

부석사의 환상적인 은행나무 길에도 여지없이 사람들의 행렬..

 

 

 

                   인파속에 떠밀려 오르니 드뎌 일주문이 눈앞에...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1963년 1.21지정),

간결 단아해 보이게 가늘고 긴 편이면서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가 있어 안정감이 있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다보니 촬영포인트를 잡기가 여간 어렵지않아...

 

 

 

부섯사 현판아래로 희미하게 다섯분의 부처님형상이 비친다.

실은 부처님을 직접 모셔놓은것은 아니지만 용마루건축물의 일부분이 부처님모습으로 현시하신것이란다.

어때요? 부처님모습으로 보이시나요? 자세히 바라 보세요.

 

 부석사 석축

천왕문을 지나서 시작한 석축은 9단~10단으로 구성되어있다

삼층석탑과 종무소가 잇는공간을 오르는곳과 범종루,안양루를 오르는 3단계석축이 있다.

 

 

절간 곳곳마다 사람...사람...사람들...

 

                    통일신라 후기  문무왕때 세워진 석탑이다.

                    동탑과 서탑이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

 

부석사는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전각들로 구성되어 있어  오랜 세월을 겪은 나무색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천년의 세월을 버티어온 기둥의 나무결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한다.

 

 

 

대석단 위 범종각. 법고와 목어가 위치해있다.

 

 

 

 

극락으로 인도하는 안양문을 오르면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을 만나게 된다.

국보 제 18호로 지정되었다.

팔작지붕에 처마를 받치는 장식을 기둥에만 올린 주심포양식으로

수덕사 대웅전,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중의 하나이다.

 

무량수전의 현판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진다.

오랜세월 풍파에도 견디어온 단아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빛바랜 편액.

 

석등안으로 살며시 바라 본 무량수전의 현판.

국보 제 17호인 안양루 바로 앞의 석등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었고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사면에 공양미륵상의 손 모양이 다르다.

 

 

浮石의 전설

당나라에 머물며 공부하는 의상에게 첫눈에 반한 신묘낭자, 의상을 흠모했지만 연을 맺지는 못했다.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올 때, 법복을 전해주려고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빌면서 배를 향해 법복을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의상과 함께 갈 수 없었던 선묘는 용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고,

하늘이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의상은 귀국 후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문무왕의 명을 받고 지금의 부석사 자리를 절터로 정했으나,

이미 이곳에 절을 짓고 사는 다른 종파의 500여 불승들이 크게 반발했다.

의상이 부처님께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의상은 새 절을 짓게 되었다.

선묘의 넋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이 된 것으로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바위가 정말 떠 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에 
"위 아래 바위 사이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 고 적혀 있단다.
다음에 부석사에 가는 분들은 바늘과 실을 가져가서 확인해 보시라~ ^^  

 

 

 

 부석사의 상징바위인 부석옆에는 누군가가 붙여놓은 동전들이 무수히 붙어있다.

어린아이가 동전을 바위에 붙이려 애쓰고 있다.

 

 

 경내에 배치된 전각들의 모습이 매우 안정적이고 질서있게 배치되어있다.

 

 

무량수전에 모신 부처님은 다른 사찰과 달리 동편을 바라보며 서편에 위치했다.

부석사는 호국사찰이기 때문에 신라의 경주를 향해 있다고 한다.

안에 모신 소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정교하고

소조상(흙으로 빚은 불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국보 45호로 지정되었다. 

 

 

                             .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뻗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펼쳐진다.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이곳의 일몰풍경은 사진사들에게도 유명한 포인트이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다.

 

 

부석사 무량수전 마당에서 바라 본 일몰직전 하늘의 빛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