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

희방사엘 가다

ds3ckb 2009. 7. 27. 23:37

 희방폭포

높이 28m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이다.

소백산 주요등산로인 제1연화봉(1,394m) 코스 입구에 있다.

폭포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이 절경이다.

폭포 바로 위에는 희방사가 있으며, 폭포 아래의 희방계곡은 숲이 울창하고

계곡 물이 차서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여름 산사에 가면 굳이 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숲 속만 거닐어도,

마음은 세속을 멀리 떠나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니 좋다.

숲을 따라 오르니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희방 폭포가 하얀 면사포를 수풀 속에 숨기고 서있다.

 

 

비가 내리는 숲길엔 인적마저 뜸하고...

 

희방사

희방역에서 동북쪽으로 4km나 되는 소백산기슭 해발850m 높이에 있으며, 신라 (643년)에 두운대사가 세웠다. 법당과 훈민정음의 원판과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6.25전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953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이  있다. 절 입구는 자연림이 우거져 햇빛을 가리고 있다.

 

소시적에 가본 희방사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예전엔 꼬불꼬불 산길을 반드시 걸어올랐지만 지금은 절마당까지 찻길이 열려있어서

오솔길을 걷던 옛정취는 사라지고 없어서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산속에 자리잡은 절간이라고해서

현대문명의 편리성을 거스를수야 있으랴...

 작은 절간에 지나지 않았던 희방사의 변한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방사동종

도유형문화재 226호.조선 영조 때 만든 범종으로,크기는 높이 88cm, 용뉴 18cm, 밑지름 56.5cm이다.

현재 단청불사가 진행중이다.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웠을까? 탑신 주위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철없는 고추잠자리가 오후의 햇살아래 졸고있다.

 

희방사 다람쥐는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희방사에 오르는길 옆에서 다람쥐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다.

이쁜 S-Line을 뽐내듯이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모델노릇을 해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약육강식은 어느곳에나...

 

 

 

 

 

 삼각대를 놓고 어렵사리 얻은 한컷!

 

 

 

  배고프고 ...피곤하고...지치고...

  단양 대강면에 있는 청국장으로 유명한 장림산방에서 3시가 넘어서야 늦은 점심을 먹다.

 

두운조사와 호랑이

 희방사(喜方寺)에는 창건 전설이 있다.

선덕여왕 12년(643년) 두운(杜雲) 조사가 수행을 하기 위해  태백산 심원암에 거처하다가

다시 지금의 희방사가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지금도 희방사는 울창한 숲 속에 있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인가로부터 먼 숲 속이어서

산짐승들만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수도에 열중하고 있는데, 암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괴로운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는 출산을 앞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여, 부엌에 검불을 깔고 출산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얼마 안 있어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조사는 겨울이 다 가도록 돌봐주었고, 봄이 되자 호랑이는 새끼를 데리고 떠나갔다.

 얼마 있다가 다시 암 호랑이가 왔는데,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은비녀가 목에 걸려 있었다. 사람을 잡아 먹다가 비녀가 목에 걸린 것이었다.

조사는 크게 꾸짖고 비녀를 꺼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것을 먹지마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났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려 밖에 나가보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한 마리 물어다 놓았다.

은혜를 갚기 위해 잡아온 것이 분명했으나, 수행하는 중이 그런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면서 갔다. 다시 며칠 지나 이번에는 호랑이가 예쁜 처녀를 물고왔다.

처녀는 기절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게 하고 처녀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의 딸인데,

결혼식을 치른 뒤 막 신방에 들려는 순간 잡혀 왔다고 하였다.

 조사는 부모가 큰 걱정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처녀를 남장하여 경주로 데려갔다.

유석은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 딸을 데리고 살아라고 하였다.

조사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몇 달간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여 조사는 몇 달간 유석의 집에 머물렀다.

 몇 개월 지난 뒤에 나귀를 타고 수도하던 곳으로 와보니 초막은 단청이 잘 된 법당으로 변해 있었다.

유석이 은혜를 갚고자 조사가 자기 집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법당을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에 기쁨을 주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희방사라고 했다고 한다.

 지장전 안에는 두운 조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물론 위의 전설은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전설이다.

두운 조사와는 관련이 없다. 아마 다른 전설이 두운 조사의 전설과 결합되었을 것이다.

호장이라는 벼슬은 고려초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 지방을 관리하기 위해 지방 호족을 호장으로 삼았다.

일종의 지방 자치인 셈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체제가 강화되자 호장은 아전으로 전락한다.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