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권비영지음....을 읽고.
아...덕혜옹주....
작년 가을쯤 연휴를 틈타서 대마도엘 여행했다.
옛 우리땅이었던 대마도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 역사속 인물중 한분인 덕혜옹주의 발자취를 보고
비운의 황녀인 그녀의 삶에 가슴이 아릿해옴을 느꼈다.
덕혜옹주의 삶을 설명하던 여행 가이드가 같은 여자로서의
한많은 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려서
일행모두가 숙연해졌던 그때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려졌다.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덕혜옹주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소설이 한편정도 있다고한다.
최근 권비영작가의 "덕혜옹주"책이 출간되어 요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가 되었다.
작가는 옹주의 흔적을 찾으려 대마도를 세번이나 방문하였다고 한다.
몰락한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 한많은 생을 살다간 비운의 여인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황제가 세수 60세에 양 귀인 이라는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고명딸이었다.
고종은 이 어여쁜 딸을 서슴없이 옥체를 던져 업어주기를 주저하지 않을만큼 덕혜를 사랑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일제 식민지하에 태어난 황녀로써,
우리나라의 것보다 일본의 것을 배우고 자랐다
고종황제는 막내딸 덕혜옹주가 영친왕처럼 일본의 볼모로 잡혀갈것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믿을만한 궁내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환과 혼인을 시키려 하였으니
이마저도 일본 첩자인 한상학의 밀고에 의해 허사로 돌아가고
고종은 덕혜가 7살 되던해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는다.
이 사건은 덕혜에게 평생토록 가슴에 맺혀
13세에 신여성으로의 교육을 핑계로 일본에 볼모로 유학을 가서도
본인이 소지한 물병이외의 물은 절대로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것을 배웠다고는하나 한순간도 조선인 임을 잊지 않았고
누구 보다도 따듯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다.
어느날 마차를 타고 길을 가던중 또래의 소녀가 일본순사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보고
직접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구해주고 그녀는 평생을 덕혜옹주만을 위해 살아가는 나인이 된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와 친일파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된다.
그곳에서 덕혜는 고국에의 향수병과 급우들의 이지메에 시달리면서
조센징의 공주라고 심한왕따를 당한다.
일본유학중에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운명하였지만 서녀는 왕족의 상복을 입을 수 없다는
일본의 왕공가궤범의 규정을 들어 상복도 입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고초로 인하여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오빠인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양아들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국의 옹주와 실권도 없는 대마도번주의 양아들과의 결혼에 굴욕감과 허탈감에
우울증은 더욱 깊어진다.
나는 옹주가 결코 정신병자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의 뜻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암울한 현실속에서
그 영혼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던것이 아닐까?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깊었지만 결코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던 박탈감에
우울증이 깊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옹주의 증세는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거의 15년동안 입원하였다.하지만... 두사람의 관계는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을 앓으면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덕혜옹주는 어렸을 때 부터 부모를 잃은 슬픔과,
학우들에 의한 노골적인 따돌림로 인해 정신질환을 얻게 되고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했다.
당시 '정신병'은 부끄러운 병으로 인식되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한 남편 '소 다케유키'는 처음에는 그녀를 치유하려 했으나,
그도 점점 지쳐가서 뒤에 가서는 옹주를 방에 가두고 묶어 두는등의 학대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점차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도 식어갔다.
딸 '마사에' 또한 이런 엄마를 매우 수치스러워 했으며,
덕혜옹주가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외동딸이었던 정혜는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하면서 자란다
그러므로 어머니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고 나중에는 정신병자인 어머니를 외면하면서
일본인 아버지에게만 애정을 쏟는다.
1955년 소 다케유키는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정신병동에 갇혀있는 옹주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고한다.
외동딸 정혜는 1956년에 일본인 청년과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이 불행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이때 정헤의 나이 24세때의 일이다.
정혜의 죽음은 자살이거나 아니면 시댁쪽으로부터 타살되었다는 여러가지설이 있지만
정확히 확인된바는 없다.
외동딸 정혜의 죽음으로 인해 옹주의 병은 더욱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이 소설은 몇몇 장면을 제외한 중요 내용이 거의 사실에 기초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옹주와 혼인을 성사시키려던 김황진의 조카 김장환은
박무영이라는 가명으로 후에 일본으로 밀항하여 옹주의 결혼식장에서
극적인 구출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수포로 돌아간다.
마지막 환국을 돕는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옹주의 환국에는 이방자여사의 힘이 컸다고 알고있다.
읽고난 후에 소설밖 이야기...
해방이 된 이후에도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고한다.
당시 왕정복귀를 우려하는 이승만정권에 의해 귀국이 거부되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전 국가재건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덕혜옹주의 환국을 약속했다고 한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환국당시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상궁'이 공항에 마중나가 눈물을 흘리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자신의 유모였던 변상궁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이방자 여사와 함께 지냈다.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덕혜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난날,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가 보고싶다며 만나달라는 편지를 썼지만,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가 과거에 받은 정신적인 충격때문에 옹주의 병세가
더 심해질까봐 염려된다'며 소 다케유키의 청을 거절하였으며,
후에 그는 다시 낙선재로 직접 찾아왔지만 문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의 소식은 알 수 없고, 둘은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소 다케유키는 옹주와 이혼한 이듬해에 재혼하였고 1985년 사망하였다고한다.
이후 덕혜옹주는 끝내 실어증과 지병으로 6년후, 파란만장하고 슬픈 삶을 뒤로한체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1983년 어느 정신이 맑았던날 덕혜옹주는 서툰 한글로 썼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몰락한 왕조의 공주로 태어나 여자로서의 행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망에 모두 빼앗기고
불행으로 점철된 한많은 일생을 살았던 비운의 황녀
덕헤옹주...
그녀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아래 사진들은 소설속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작년 대마도에 갔을때 담아온 유적사진과
덕혜옹주의 삶의 편린들을 모은 자료를 인터넷에서 모셔왔다.
덕혜옹주의 돐사진
어릴적 덕혜옹주의 모습
일본으로 유학가서 입학하고 있는 덕혜옹주.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일본학교에서 수업중인 덕혜옹주
1931년 5월 덕혜옹주의 결혼에 조선인들은 비탄했고 또 분노했다.
당시 조선일보에 기사에는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을 전하며,
결혼사진에서 아예 남편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신문에 개제하는등
조선에서 덕혜옹주가 일본인에게 시집을 간다는 소식은 당시 큰 충격이자 국민적 치욕이었다.
'소 다케유키'에게 시집가는 덕혜옹주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 (신랑의 모습이 지워져 있다)
작년에 대마도 여행에서 직접 찍은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사진을 옮겨 담는다.
비석내용에는 옹주를 강제로 정략결혼시킨 일제의 만행은 한자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국민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두사람은 애정이 깊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기원한다고 새기었는데 자국의 왕은 천황이라고 내세우면서
옹주의 친정인 한국왕실은 단순히 왕가(王家)로 표현해놓은 국수주의앞에
과연 진정한 선린우호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31년 종무지와 덕혜옹주가 대마도를 방문하였을때 찍었던 사진 .덕혜옹주는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입국하는 덕혜옹주
덕혜옹주의 회갑연. (왼쪽 두번째)
지금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의 아버지 고종황제의 뒤에 쓸쓸히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