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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춘 / 오탁번 **

ds3ckb 2008. 6. 18. 20:48

                                                        [小春/오탁번]




 
 
    小春 - 음력 시월을 小春이라 부른다 된서리 내린 깊은 가을 해거름 삐약삐약 핸드폰이 울더니 버선코 같은 초저녁별 한 접 보냄다’ 간질간질한 메시지가 오네 명왕성 근처 과수원에서 퀵 서비스 광속으로 보내온 능금처럼 잘 익은 초저녁별 한 접 받아 드네 사라져간 젊음의 피톨 하나하나 서럽게 불러내어 반짝이는 등불을 켜듯 별 하나 하나 맛있게 까 먹네 봄날처럼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기러기 혓바닥만한 小春의 들녘에는 알맹이 다 털어버린 볏단이 면도도 하지 않은 흰 수염 다붓한 내 턱처럼 시린데 그대와 나 아직 못다 한 인연이라도 있는지 그렇고말고 시늉하듯 초저녁별 깜박깜박 빛나네 스톤헨지 세우고 피라밋 뚝딱 만들던 선사시대의 거인처럼 별 한 접 다 먹고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는 하늘에는 되똥되똥 길 잘못 든 살별 하나 능금껍질처럼 곡선으로 사라지네 안 되겠다 안 되겠다 그대와 나 버선코마냥 오똑오똑한 새끼를 낳자 앙증맞은 小春의 햇볕 아래 토실토실하게 키운 새끼가 깡총깡총 태양계 너머로 달아나면 우리는 그냥 팔짱을 끼고 새끼 따라 은근슬쩍 잠적해버리자 詩/오탁번

 

오탁번(65) 시인은 1966년에 동화 당선, 1967년에 시 당선, 1969년에 소설 당선이라는 신춘문예 3관왕의 화려한 등단 이력을 갖고 있다(김은자 시인을 아내로 둔 시인 커플로도 유명한데, 김은자 시인도 신춘문예 2관왕 출신이다). 이 시는 그의 시 데뷔작이다.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다니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는 일화를 나는 언젠가 들었다. 대학에서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가끔은 밤새 쓴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학생들로부터 터놓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도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기말시험에 '학교에 자목련나무가 몇 그루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을 정도였다.

요즘 오탁번 시인은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그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렸다. 그곳서 그는 시골 아이들에게 시를 읽히는 훈장님이다. 그곳서 그는 우리가 잊어버린 토박이 우리말을 되살려내는 시를 쓰고 있다. "산 속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그 속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말하는 순은의 시인이다.